바오밥나무가 있는 별 하나...

baobabstar.egloos.com

포토로그



고구려의 산성들 한국사 자료-삼국시대/통일신라

고구려의 산성들

오녀산성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 오녀산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음

환런현 중심에서 8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820m에 있다. 높이 200m의 절벽을 그대로 살려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은 산성으로, 산성 안에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만이 남아 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라고 하는 샘이 있고, 1996~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의 유물 2,000여 점이 발굴되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

-평지성+산성=한 조

-산성으로 피란하면 평지성은 불타 없어짐

국내성

중국 지린성 지안현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조금 더 길다. 지안현 서북쪽 2.5km 지점에 산성자산성(위나암성)이 있는데,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이곳으로 피란하여 대적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유리왕 22년에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卒本)에서 이곳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427(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도읍지였다.

위나암성

중국 지린성 지안현

유리왕 22년에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위나암성은 전시 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위나암성 또는 위나야성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산성자산성으로 불려지다가 산성자산의 이름이 환도산으로 바뀌면서 현재는 환도산성으로도 불리고 있다. 위나암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평양성

-북한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는 427(장수왕 15)이며,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왕궁은 평양시 대성산 기슭의 안학궁이었지만, 안학궁 뒤편에 대성산성을 축조하여 전쟁 때는 이곳으로 옮겨갔다. 586(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長安成)으로 옮겼으며, 현재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평양성은 왕궁, 산성, 서민들이 사는 곳이 모두 성안에 있는 최초의 성이었고, 이러한 도성의 모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안시성

-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에 있던 산성

-다양한 소재지 견해 존재함

<삼국사기>에 의하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이며, 고구려가 요하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성 중에서 전략적으로 요동성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다.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국내성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방어 하는 데 매우 중요하였다.

<추정 소재지>

-금사: 만주 개평 동북의 탕지보

-이계집/아방강역고: 만주의 봉황성

-현재 학계 견해 : 중국 랴오닝성 창다철도의 하이청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로 추정

비사성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 유이향 동쪽의 대흑산

비사성은 필사성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대흑산에 있는 산성이라 하여 대흑산산성으로 부른다. 고구려 때 축조된 성이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흑산 주위에 석회암으로 쌓은 거대한 석성으로, 고구려가 수당과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 역할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서문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오리산성

-북한 평북 태천군 용상리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56

용상리 산성산(山城山)에 있는 석성으로, 고구려 때 어구루가 쌓았다고 한다. 산성산의 동북쪽으로 둘러 막힌 봉우리와 능선을 의지하여 외면축조방법으로, 사각뿔 형태로 다듬은 성돌로 서로 어긋나게 물려서 쌓았다. 성문터암문수구문장대지옹성봉수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북한의 사적 제37호였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56호로 변경되었다. 

<성의 축조와 관련된 글>

을해년 8월 전부에 속한 소대사자 어구루가 성을 684칸 쌓았다"

*전부: 고구려시대 평양성의 5부 중 하나

*을해년:435(고구려 장수왕 22), 495(고구려 문자왕 4), 555(고구려 양원왕 10) 등으로 추정됨


*안시성싸움:
645
(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순차적으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하여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 및 말갈 연합군대 15만 명이 출병하였지만, 당나라 군대에 패하였다. 그때까지도 함락되지 않은 안시성에서 마침내 최후의 격전을 벌어지는데, 성주 양만춘은 군사와 주민들의 힘을 모아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안시성 싸움이다. 고구려 멸망(668) 후에는 검모잠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지만, 671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수/당의 고구려 공격:

1)614(영양왕 25) 수나라 양제가 마지막으로 고구려를 침공할 때 비사성까지 진격한다. 하지만, 고구려군은 하나뿐인 성문을 굳게 닫고 저항하였기 때문에 수나라군은 단 하나의 성도 빼앗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수나라는 결국 건국한 지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2)645 4, 당나라는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로군으로 비사성을 공격한다. 그런 다음 다음달 초 정예병으로 서문을 기습 공격하는데, 이 공격에서 고구려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퇴로가 없어 살아남은 8,0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이끄는 막강한 당군이 안시성싸움에서 패하자 수군도 모두 철군한다.

<고구려 관련 기사 모음>
http://baobabstar.egloos.com/10757231





mouse b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