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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속 이시애의 난에 관한 기록-신숙주, 한명회, 신면의 관한 기록 중심 한국사 자료-조선

세조실록 속 이시애의 난-신숙주,한명회, 신면의 관한 기록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19일(계미) 1번째기사
이시애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으므로 신숙주·한명회를 가두게 하다  
  
함길도 사람 최부상(崔富商)이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의 글 2통을 가지고 왔는데, 그 하나에 이르기를,
“만약 군사를 함흥(咸興)에 모으면 민간이 소요(騷擾)할까 두려우니, 제읍(諸邑)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돈하여 명령을 기다리게 하소서.”
하였고, 그 하나에 이르기를,
“홍원(洪原) 사람 이중호(李仲湖)가 절간(折簡)을 함흥부(咸興府)의 토관(土官)에게 보내어서 박효달(朴孝達)을 모살(謀殺)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양의전(兩儀殿)의 문(門)에 나아가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과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상정소(詳定所) 당상(堂上)·승지(承旨) 등을 불러 이르기를,
“근자에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되었으니, 비록 반역(反逆)한 것은 아닐지라도, 반종(伴從)을 신칙(申飭)하지 못하고 인군을 배반하였다는 악명(惡名)을 받아서, 원근의 의혹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나도 또한 어리석고 나약하여 위엄이 없는데, 백성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방편(方便)을 생각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 우선 이들을 가두어 두는 것이 옳겠다.”
하고, 곧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선전관(宣傳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신숙주와 그 아들 신찬(申澯)·신정(申瀞)·신준(申浚)·신부(申溥) 등을 잡아다가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한명회는 단종(丹腫)이 발병하여 집에 있으므로, 영천군(鈴川君) 이찬(李穳)으로 하여금 보병(步兵) 30명을 거느리고 가서 지키게 하고, 그 아들 한보(韓堡)와 사위 윤반(尹磻)을 가두게 하였으며,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김기(金琦)를 보내어 신면(申㴐)을 잡아 오게 하였다. 이날 구치관(具致寬)이 밀계(密啓)하여 신숙주와 한명회 등을 가두도록 청한 까닭에, 임금의 이 명령이 있은 것이었다.
 
세조실록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2일(병술) 2번째기사
도총사의 종사관 김관이 이시애의 모반한 정상을 아뢰다  
  
명하여 우참찬(右參贊) 김국광(金國光)과 이조 판서 한계희(韓繼禧)·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에게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면서 함길도의 사변에 대기하게 하였는데, 도총사(都摠使)의 종사관(從事官) 김관(金瓘)이 왔으므로,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으로 불러 들였다. 김관이 아뢰기를,
“회양(淮陽)의 노상에서 한 역마를 탄 사람이 숲 사이로 달려가 숨는 자가 있기에, 그를 잡아서 물었더니, 바로 함흥(咸興) 사람 김성주(金成柱)였습니다. 김성주는 윤자운(尹子雲)이 올리는 ‘반적들이 신면(申㴐) 등을 죽인 일’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글은 윤자운이 손수 작성한 것이 아니고, 실은 적당(賊黨)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윤자운을 협박하여 서명(署名)한 것이었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신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은 반신(反臣) 신숙주(申叔舟)의 아들로서, 도리어 「이시애(李施愛)가 모반(謀反)하였다.」 하며, 자칭 중위 장(中衛將)이라 하고, 박종문(朴宗文)과 구치동(丘致峒)을 좌위 장(左衛將)·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아, 발병부(發兵符)도 없이 원판(圓板)의 표신(標信)을 사용해서 북청(北靑) 이남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으고는, 변처관(邊處寬)으로 하여금 군사를 영솔하여 함관령(咸關領)에 웅거하게 하고, 이효석(李孝碩)은 송동령(松洞嶺)에 웅거하게 하며, 또 평안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거민(居民)들을 모두 죽이고서, 마침내 서울로 향하려고 하고, 또 심원(沈湲)으로 하여금 이시애의 족류(族類)들을 잡아 가두게 한 까닭에, 지금 모두 죽이고, 신으로 하여금 동쪽 백성들을 위로하여 안심시키게 하였으므로, 신면의 모반에 간여하지 않은 자는 아직 머물러 두고 죽이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김성주가 또 이르기를, ‘이시합(李施合)이 재상(宰相)의 의물(儀物)을 갖추고 군사를 영솔하여 함흥(咸興)에 도착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지금 유지(諭旨)가 있었는데, 나의 형(兄) 이시애를 절도사(節度使)로 삼고, 나를 우후(虞候)로 삼았다.」 하고, 마침내 신면(申㴐)·구치동(丘致峒)과 도사(都事) 박종문(朴宗文)·정평 부사(定平府使) 이효석(李孝碩), 그리고 윤자운(尹子雲)의 반인(伴人)·가노(家奴) 등을 죽이고
(중략...)
이준(李浚)이 김성주를 회양(淮陽)에 수금(囚禁)하였을 때는 이시합은 실지로 함흥(咸興)에 오지 않았었는데, 김성주가 거짓말을 하여, 함흥에서 반적들이 다섯 사람을 죽인 죄를 면하게 하려고 함이었습니다. 신면이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에 이르렀을 적에, 신면의 아우 신정(申瀞)의 처(妻)의 종인 나근내(羅勤乃)가 부성(府城) 밖에 살다가, ‘부인(府人)들이 새 감사(監司)가 〈함흥부에〉 이르기를 기다려서 죽이고 반적에게 응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신면의 종인(從人) 곽인중(郭仁仲)에게 은밀히 말하고 또 이르기를, ‘급히 남도(南道)로 돌아가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하니, 곽인중이 이를 고하였습니다. 신면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본영(本營)에 이르러 양식과 기계가 모두 구비하였는데, 어찌 두려움을 피하여 반적들로 하여금 성을 점거하고, 솔개가 날개를 편 것같이 〈득의(得意)하게〉 함이 옳겠느냐? 오늘의 일은 진격만이 있고 퇴각은 없을 것이다. 이것만이 내가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때다.’ 하고는, 마침내 남도(南道)의 군사를 징발하여 수어(守禦)의 계책으로 삼았는데, 18일 밤 초경에 함흥 여수(咸興旅帥) 윤극검(尹克儉)과 사직(司直) 이중화(李仲和) 등이 ‘신면이 모반(謀反)하였다.’고 성언(聲言)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여, 마침내 감사(監司)의 아문을 포위하고 공격하며 부르짖기를, ‘이영공(李令公)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미 왔으니, 신면은 빨리 나오너라.’ 하니,
신면이 곽인중을 시켜 말하기를, ‘너희 고을 사람이 반적을 오인하니 그것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반적이 문틈으로 곽인중을 활로 쏘아 죽이고, 또 신면이 누(樓)로 올라가니, 반적이 난간에 들어가 칼을 빼어 들고 앞으로 돌진하며 호통하여 말하기를, ‘네가 지금 속히 내려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니, 신면이 말하기를, ‘너희 한 고을 사람은 어찌 한 사람도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를 아는 자가 없느냐? 내가 명령을 받고 너희 한 도(道)의 사람을 안무(按撫)하러 왔는데, 네가 반적과 응하여 나를 죽이려 하니, 내 어찌 〈너에게 항복하여〉 삶을 도둑질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적의 공격이 더욱 빠르고, 횃불을 나열하여 방패로 가리며 사면에서 어지럽게 활을 쏘며 먼저 사람을 시켜 신면의 화살통[矢筩]을 훔치게 하니, 신면이 대전(大箭) 6매(枚)를 가지고 기둥에 의지하여 활을 쏘아 적의 얼굴을 맞히었으나, 적이 또 화포(火砲)를 던져서 연기와 화염이 서로 창일하니, 신면이 형세가 다하여 활을 꺾어 던지고, 마침내 아래로 떨어져 담장을 넘으려고 하는데, 적이 죽이고, 구치동(丘致峒)과 박종문(朴宗文)·녹사(錄事) 엄유구(嚴悠久)와 반인(伴人)·가노(家奴) 등까지 모두 죽였으며, 윤자운(尹子雲)을 객사(客舍)의 별실(別室)에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신면은 승지(承旨)가 된 지 5년이 되었어도 일찍이 과실이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 죽을 때의 나이가 30이며, 아들이 둘이 있으니, 신용관(申用灌)과 신용개(申用漑)이다. 김관(金瓘)이 원병(援兵)을 청하니, 임금이 김국광(金國光)과 한계희(韓繼禧)·윤필상(尹弼商)을 불러 김관과 더불어 의논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관군(官軍)을 속히 출발시켜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붙여 주어라. 나도 또한 친정(親征)하겠다.”
하였다. 
(하략...)  

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24일(무자) 7번째기사
안변 향리 등이 이시애의 반역 정상과 신면을 죽인 일을 아뢰다
  
  
종사관(從事官) 김순명(金順命)이 안변 향리(安邊鄕吏) 김수남(金壽男)과 내수사(內需司) 종 막동(莫同)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알현하도록 허락하였다. 김수남이 아뢰기를,
“신이 영리(營吏)로서 함흥(咸興)에 이르렀더니,
신면(申㴐)이, 이시애가 수령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군사를 모아 미리 방어하였는데, 처음에 이시애가 함흥 사람 이중화(李仲和)를 시켜서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기를, ‘신임 관찰사(觀察使) 신면(申㴐)은 바로 난신(亂臣) 신숙주(申叔舟)의 아들이고, 또 이 간당(姦黨)이 저렇게 군사를 징발하니, 곧 죽여야 옳다.’고 한 까닭에, 향중(鄕中)의 품관(品官)에서 노예(奴隷)에 이르기까지 함께 응하여 죽였으며,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효석(李孝碩)도 또한 그 고을 사람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하고, 막동은 아뢰기를,
“향중의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계서(啓書)를 가지고 서울에 이르는 자는 문득 가두기 때문에, 여러 차례나 치계(馳啓)하였어도 간 방향을 알 수 없으니, 이는 반드시 간신(姦臣)의 소위이다. 너는 본궁(本宮)의 종이니, 지금 가지고 가는 글을 만약 아뢸 수가 없게 되면, 몰래 내종친(內宗親)에게 부탁하여 그 글을 계달(啓達)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글은〉 역시 윤자운(尹子雲)이 협박을 당하여 서명(署名)한 것과 이시애가 함흥 유향소(咸興留鄕所) 에 이문(移文)한 것이었다. 그 윤자운의 글에 이르기를,
“신이 이 도의 인심을 살펴보니, 봄부터 왜선(倭船)의 뜬소문이 있은 뒤로 마침내 서로 놀라고 의혹하였는데, 지금 강효문(康孝文)이 반역을 꾀하여, 이시애가 그를 죽이고 길주(吉州)에 있으면서 조정(朝廷)의 처치(處置)를 기다리고 있으며, 제읍(諸邑)의 품관(品官)들이 그 지휘(指揮)를 받아 강효문의 여당(餘黨)인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들을 죽이므로, 신이 곧 연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으나 구처(區處)를 알지 못하고, 사람마다 모두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신의 뜻도 또한 사세(事勢)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속히 종친·대신에게 특별히 명하여, 유서(諭書)를 가지고 와서 화복(禍福)을 개설(開說)하여 허물을 용서하고 위로해 안심시키며, 또 사람을 이시애에게 보내어 그 반역을 토벌한 공을 상주셔서, 한 도(道)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시애의 이문(移文)에 이르기를,
“강효문의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강효문이 황기곤(黃起崐)과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북청(北靑)을 향하여 출발하다가 이미 주살(誅殺)되었으나, 오직 황기곤만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 군사를 모아 난리를 꾸밀까 염려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북청(北靑)의 유향소(留鄕所)에 이문(移文)하여 그를 추포(追捕)하게 하며, 더구나 신면(申㴐)도 또한 이들의 간당(姦黨)이니, 만약에 군사를 징집하는 일이 있거든 모름지기 곧 베어 없애고, 또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고을 군사들을 징집하여 한광(閑曠)한 땅에 복병(伏兵)시키고 명령을 기다리라.”
하였다. 막동(莫同)은 임금의 잠저(潛邸) 때의 근수(根隨)이었다. 임금이 묻기를,
“민심[民情]이 이시애를 충성한다고 하더냐? 어찌하여 이시애를 도와 내가 부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이처럼 많으냐?”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에 이시애의 반역한 정상을 일찍이 알았다면, 내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다만 민심이 순역(順逆)을 알지 못하고 꾀임에 빠졌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따랐을 뿐입니다. 만약 유서(諭書)를 내려서 순역(順逆)을 명확하게 알게 한다면, 그 형세는 곧 해이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곧 막동에게 의복(衣服) 등의 물건을 내려 주고, 어찰(御札)의 유서(諭書) 3통(通)을 주어서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에게 송부하였다. 그 하나에 이르기를,
“제읍(諸邑)의 관리(官吏)·군민(軍民) 등에게 유시한다. 이시애가 처음에 반적을 토벌한다고 성언(聲言)하여, 너희들이 곧이곧대로 듣고 따랐으나, 이제는 이시애가 절도사(節度使)를 사칭하여, 그 스스로 반역하였음이 명확한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속히 〈그를〉 잡아 오지 않느냐? 본도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故鄕)이므로, 내가 순행(巡幸)하려 한 지가 오래다. 이제 친정(親征)함으로 말미암아 겸하여 군민(軍民)을 순무(巡撫)할 것이니, 너희들은 이 뜻을 알고 속히 이시애를 잡아 목베아 군전(軍前)에 바치라.”
하고, 그 하나에 이르기를,
“함흥(咸興) 유향소(留鄕所) 에 유시한다. 이시애(李施愛)의 반역한 정상이 명백하고, 너희들을 거짓으로 속여 꾀었는데, 너희들은 무슨 까닭으로 역적을 좇아 왕명(王命)을 받은 사람을 죽였느냐? 이것은 고금의 큰 죄악아며, 천지의 귀신이 용납하지 않는 바이다. 지금 이미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보내어 4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고, 나도 친히 대병(大兵)을 가지고 뒤를 따를 것인데, 아직 너희들이 협종(脅從)하고 진위(眞僞)를 알지 못하니, 만약에 대병(大兵)을 한번 가하면 옥석(玉石)이 구분(俱焚)될까 염려하여, 우선 준(浚)으로 하여금 군사를 머물러 출동하지 말고 어가(御駕)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하고, 먼저 유서(諭書)를 보내어 이해(利害)를 효유(曉諭)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끝내 적당(賊黨)에 빠지지 말게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오히려 개오(改悟)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어 돌아오지 않으면, 내 반드시 성(城)을 함락하여 생민(生民)이 〈하나도〉 남음이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다시 살려고 하거든, 윤자운(尹子雲)을 속히 석방하고 이시애를 잡아서 전과(前過)를 속죄하면, 재앙을 뒤엎고 복을 이룰 것이다.”
하고, 그 하나는 글의 내용이 경저인(京邸人)이 가지고 간 글과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김수남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하였다.
 
<이시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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