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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사람들(5)-정초, 이순지, 장영실 [과학] 한국사 자료-조선

세종의 사람들(5)-정초, 이순지, 장영실 [과학]

정초(鄭招, ?~1434)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419년(세종 1) 공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좌대언(左代言)이 되었으며, 1423년 함길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430년 공조참판으로서 세종의 명을 받아 관찬(官撰)으로서는 최고의 농서(農書)인<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였고, 이어 예문관대제학으로 정인지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하였다. 역사와 천문에 밝아 1431년 왕명으로<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하였고,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필요한 고전을 수집하여 1433년 이천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자: 열지(悅之) 시호: 문경(文景))

세종실록 44권,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5월 16일(신유) 2번째기사
<농사직설>의 서문  
 
총제(摠制)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찬술(撰述)하게 하는데, 그 서문에,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이를 힘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순제(舜帝)가 9관(官)) 과 12목(牧)에게 명하실 적에 맨먼저 ‘먹는 것은 농사 시기에 달렸다.’ 하였으니, 진실로 자성(粢盛) 의 용도(用度)와 생양(生養)의 자료(資料)도 이것을 떠나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일찍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시어 옛날 농서(農書)로서 절실히 쓰이는 말들을 뽑아서 향언(鄕言) 으로 주(註)를 붙여 판각(板刻) 반포하게 하여, 백성을 가르쳐서 농사를 힘쓰게 하셨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명군(明君)을 계승하여 정사에 힘을 써 더욱 민사(民事)에 마음을 두셨다. 오방(五方)의 풍토(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適性)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들을 방문(訪問)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또 신(臣) 초(招)와 변효문(卞孝文)과 더불어 피열(披閱) 참고(參考)하여 그 중복(重複)된 것을 버리고 그 절요(切要)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編)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였다. 농사 외에는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山野)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 이미 위에 바쳐 주자소(鑄字所)에 내려서 약간 본(本)을 인쇄하여 장차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백성을 인도하여 살림을 넉넉하게 해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는 데 이르도록 할 것이다. 신이 주(周)나라 시(詩)를 보건대, 주가(周家)에서도 농사로써 나라를 다스려 8백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는데, 지금 우리 전하께서도 이 나라 백성을 잘 기르고 나라를 위하여 길이 염려하시니, 어찌 후직(后稷)과 성왕(成王)과 규범(揆範)을 같이하지 않으랴. 이 책이 비록 작더라도 그 이익됨은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순지(李純之, 1406~1465)
조선 전기의 천문학자이며, 동궁행수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외교문서를 다루는 일에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부임지는 승문원으로 외교업무를 다루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순지가 천문학 연구를 하게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세종이 한양의 위도를 물었는데 38강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후 간의대에 배치되어 천문관측기기 제작과 관측활동을 하였다. 역대 중국의 역법을 연구하였고 천문학을 이론화하는데 노력하였다. 간의규표(簡儀圭表), 태평현주(太平懸珠), 앙부일구(仰釜日晷),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다. (자: 성보(誠甫), 시호: 정평(靜平))

세종실록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15일(갑술) 2번째기사
정흠지·이순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흠지(鄭欽之)를 중추원 사로 삼고, 원창명(元昌命)을 중추원 부사로, 홍여방(洪汝方)을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이순지를 호군으로 삼았다.
처음에 순지(純之)가 역산(曆算)에 정밀하여 가장 친하고 사랑함을 받았는데, 그 어머니 상을 당함에 미쳐 특히 기복(起復)하기를 명하고, 인하여 이 벼슬에 올려 주고, 그 아버지 지사간 이맹상(李孟常)에게 전교하기를,
“모름지기 아들 순지로 하여금 벼슬에 나아가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4월 20일(기묘) 4번째기사
이순지가 벼슬을 사양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순지(李純之)가 상서하여 벼슬을 사양하기를,
“신은 장구(章句)나 이해하는 낮은 학문으로써 외람되게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4년을 벼슬하여 이문을 익혔으되 통하지 못하였고, 역법 교정(曆法校正)에 3년을 벼슬하여 역산(曆算)을 배웠으되 또한 적은 공도 없었습니다. 간의대(簡儀臺)에 수년을 종사하였으나, 그 모든 의상의 제작은 진실로 다 성상의 슬기로운 계산에서 된 것이고, 능히 한 말도 그 사이에 드리지 못하여 엎드려 다스림을 도와 이룩할 겨를이 없었으니, 한갓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만 깊을 뿐이옵니다. 신이 몇 가지 일에 힘을 다하지 아니함이 아니오나, 움직이면 문득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한 가지도 얻은 공효가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시와 꾸짖는 형벌을 더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계급을 뛰어 올려서 벼슬을 주시고 물건을 하사하여 표장하시며, 신이 이제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넉넉한 치부(致賻)를 더하시니, 덕이 지극히 우악하고 은혜가 지극히 깊으옵니다. 신이 목숨을 다하여도 능히 보답할 수 없는 바이오나, 불행히 상중에 있는 몸으로 병이 쌓이고, 정신이 황홀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데, 신의 아비 이맹상(李孟常)에게 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게 하옵시고, 갑자기 벼슬을 내리는 명이 계셨으니, 신이 여묘(盧墓)에 있다가 명을 듣고 황송하고 놀라와 옷깃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오니, 나아가고 물러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 사람의 아들로서는 매양 그 부족함을 한탄하거늘, 하물며 신은 겨우 석 달 상을 입었으니 부족한 중에서도 더욱 부족함이 심하옵니다. 만약 기년으로 이를 계산하면 8개월을 다하지 못하였고, 비록 3년으로 계산할지라도 20개월이나 부족한데, 이제 기년(朞年)도 되기 전에 벼슬에 나아간다면 무궁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여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오니, 몇 달 안에 어찌 한 가지 일인들 힘써 이룩될 리가 있사오리까. 행실이 허무러져서 풍속을 무너뜨리고, 예법에 어그러져서 거룩한 다스림에 누가 되오면, 비록 성상께서 가엾게 여길지라도 그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교리[名敎]에 있어 어떻겠으며, 신이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데 무슨 면목으로 조정 사람의 사이에 서겠습니까.
(중략...) 상복을 입는 기한 안에 급히 치료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임금에게 옮겨서 장구한 시일에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고자 하옵니다. 더군다나 이제 신에게 상복을 벗고 벼슬에 나오기를 명하신 것은 역산을 밝히는 일에 불과하오니, 이 역산이란 것은 군사에 관계되는 일과 같이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중략...) 위로는 벼슬에 이바지할 것이고 아래로는 가히 예를 지켜서, 신하와 자식의 도리를 거의 다 온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니, 이것이 또한 신의 소원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가지를 성상의 재결(裁決)로 시행하시와 효도로 다스리는 정치를 더욱 빛내고 풍속을 후하게 하옵소서. 신이 이 일에 명을 받은 이후로 성상의 말씀이 정녕하심을 입삽고, 지금도 또한 이 명이 있사오니,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일지라도 어찌 감히 마음에 잊으오리까. 이에 슬픔을 당하여 글을 올리오니,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장영실(蔣英實, ?~?)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으로, 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의 관노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외 여러 과학적 도구를 제작 완성하였다. 하지만,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당하였다. 그뒤의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세종실록 61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9월 16일(을미) 3번째기사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 ’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 ’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 ’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 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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