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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대외관계에 대하여 한국사 자료-조선

조선 전기 대외관계에 대하여
 
중국(명)과의 관계

조선시대의 주변 나라들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사대(事大)’란 원래 중국의 상고 왕조인 은(殷)과 주(周)대에 약소한 제후국이 강대한 제후국에 정치, 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한 것에서 유래했다. 중국에는 사대정책으로, 일본 및 유구·여진 등의 나라에는 교린정책으로 구분하였다. 중국보다 힘이 약한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朝貢)을 보내고, 중국은 이들 나라의 통치자를 책봉(冊封)해 줌으로써 우호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관계를 사대관계라고 하며, 중국 주변의 나라들끼리는 이러한 사대/책봉 관계를 전제로 하여 책봉을 받은 나라들 간에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1392년 7월 조선은 건국 직후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알리고 조공을 바치면서 사대의 예를 행하였다.

*토목의 변: 1449년 명나라 정통제(正統帝:英宗)가 오이라트 부장 에센[也先]과 토목(土木:河北省)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건을 말함.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건국과 태조의 즉위를 승인하지만, 곧바로 책봉은 해주지 않았다. 이유인즉, 정도전이 준비하고 있었던 북벌계획으로 인해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이 요동을 침범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곧바로 책봉을 해주지 않았다. 명에서는 생흔 3조와 모반 2조를 들어 조선사신의 입국을 금하기까지 하였다.
 

생흔 3

1. 조선은 양절의 부량민(여진족)을 이용하여 중국의 정보를 얻는다.

2. 조선은 요동변장에게 금과 은 그리고 포백을 주어 포섭하려 한다.

3. 조선은 여진인 가족 500여 명을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가게 했다.


모만 2

1. 조선은 말로만 신하라고 칭하며 입공을 하지만 보내는 말()이 모두 쓸모가 없다.

2. 국호의 개정을 허락하는 사신을 보내었는데 조선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조선은 1396년 6월에 이방원을 보내어 명의 오해를 풀었지만 표전문제로 인하여 두 나라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표전이란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문서를 말하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나타내어야 했기 때문에 명나라는 '표전' 을 가지고 문제 삼았던 것이다. 표전문제는 1396년 2월서부터 1397년 12월까지 모두 3차례 발생하였다.

대명관계의 변천

태조

-고명책인을 받지 못하였고, 조선국왕 승인이 보류되었음

-역성혁명은 승인하였지만, 여진유민의 쇄환문제, 세공문제, 요동진출문제, 주청문, 표전문 등의 외교문서 작성자를 잡아 보내라고 강력히 요구함

-金印(금인)과 誥命(고명)을 보내지 않고, 대신 權知高麗國事(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함

-宗系辨誣問題(종계변무문제) :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대명회전에 기록된 사건(선조 때 해결)

태종

-조선왕 승인 : 정도전을 제거한 이방원이 3대 태종으로 즉위하였고, 조선에 강경했던 명태조(주원장)사망하였으며, 황제계승문제로 명나라가 내분이 일어남
-
조선과의 관계개선의 필요성이 있어, 태종 1년에 금인과 고명을 조선에 보내와 조선왕을 정식으로 인정함

세종

금은세공, 공년, 貢宦(공환)이 폐지됨


조공무역에 대하여

조공무역 (공무역, 사행무역) : 조공과 回賜(회사)의 형식인 관무역으로 조선사신이 왕래하였다. 명나라사신의 내왕을 통하여 실시되었다. (왕실, 사신에 대한 선물의 증정과 공적 ∙ 사적무역, 求請(구청)) 등으로 구분하였다. 조공국이 경제적 이익을 얻는 대신 의례적으로 복속한다는 관례와 명나라가 조선의 1년 3공을 주장을 굳이 3년 1공으로 바꾸려고 고집한 점 등으로 볼 때 국가 전체 손익 문제는 단언할 수 없다.

명나라

조공은 3 1이 원칙으로 하였으며, 개시무역을 두지 않았고

祖宗之法(조종지법)으로 쇄국정책을 하였다

조선

1 3공을 주장하여 정종 2(1400) 채택되었으며,

실리와 선진문물 수입을 위하여 사행을 자주 파견하였다.


 상인들에 의한 무역인 사무역

조공사행을

통한 사무역

- 조선의 사행은 북경의 동평관, 회동관에서 유숙함

- 명의 사행은 한양 남대문안 태평관에서 유숙함

- 유숙하는 곳을 중심으로 활발한 사무역 실시됨

- 초기에는 미흡했으나, 16세기가 되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성장한 상인들이 권신, 호위군사 등과 결탁하거나, 역관, 군관으로 가장해서 사무역을 함

밀무역

조선 초기에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음, 후기에 이르러
활발해짐

관허민간무역

개시무역(명과는 없음), 임진왜란 때 중강개시가 잠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 (17세기 중엽에 공인)















수공업과 광업의 침체하였으며, 견직물(비단)의 수입으로 국내 수공업이 위축되었다. 명의 금, 은 요구를 피하기 위해 국내의 금, 은광을 거의 폐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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