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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교육 정책에 관하여 (숙종~공민왕) 한국사 자료-후삼국/고려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교육 정책에 관하여 (숙종~공민왕)


숙종

국자감에 서적포라는 출판소를 두어 서적 간행 강화함

예종

관학 7

전문별 유학 6재와 무학재를 포함한 관학 7재를 설치하였음

최충의 9재를 모방한 것으로 과거시험 준비기관의 성격을 가짐 특히, 긴박했던 여진 관계를 고려하여 우수한 무관의 육성을 위하여 무학재의 정원을 8인에서 17인으로 늘리고, 과거시험에 특전을 부여하였음. 하지만, 인종 11(1133)에 문치주의가 반영되어 무학재는 무과와 함께 철폐되었음 (여택재, 대빙재, 경덕재, 구인재, 복응재, 양정재, 무학재(무예) )

양현고

일종의 교육 장학재단이며, 관학의 경제기반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만큼 양현고는 국자감 재정의 전담기관으로 소속되어 있던 토지에 대한 권농과 수세까지도 담당하였음

도서관 및 학문연구소 설치

학사를 선발하여 충당하고 수만 권의 장서를 모아놓고 경사를 연구 토론하고 각종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대사를 정리한 편년통재속편과 당태종의 업적을 기록한 정관정요’,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서들을 집대성한 해동비록등이 이때에 편찬되었음

(청연각, 보문각, 천장각, 임천각 등 궁궐에 설치)

과거응시자의 국자감 수학 의무화

최고 학부로서 국자감의 위상을 정립하였으며, 진사도 국자감 3년 이상 수학자에게 본시험인 예부시 응시자격을 주었을 정도로, 국자감과 같은 비중으로 존재했던 12도는 국자감 하위의 교육기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음

국자감 건물 중건 및 삼사제도 운영

삼사제도(三舍制度)란 송의 국자감에서 운영되던 교육제도로서 국자감의 교육체계를 외사, 내사, 상사로 구분하고, 학생들의 교육성과에 따라 상급의 재사로 승보(승보시, 국자감시보다 한 단계 높은 시험)시켜 최후로 상사의 과정을 거쳐 관료로 연결시킨 교육제도를 말함

인종

경사 6학 제도 마련 및 지방 교육 강화(향교 중심)

인종 때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 에는 고려 왕궁에는 임천각이 있고, 장서가 수만 권이요, 노유와 숙사들이 학문을 연구하며, 개경의 거리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왕성한 학풍과 교육열을 극찬하는 내용을 전해지고 있음

무신

집권기

관학의 쇠퇴와

사학의 발달

고려 전기에 실시되던 복시가 자취를 감추게 되고 관학인 국자감이 사학 12도에 눌려 과거와 학교제도가 제대로 발달되지는 못하였음. 하지만 무신정권이 과거제도를 없애지 않고 능문능리의 신관인층의 등용문으로 삼았음

충렬왕

관학의 진흥 및

개혁

-       국학에 문묘(대성전, 공자 사당)를 건립, 경사교수도감, 섬학전(안향의 건의로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해 교육재단인 섬학전 설치) 설치하는 등 다시 관학의 진흥에 힘썼음

-       양현고의 부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교육재단으로 섬학전을 설치하였고,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고 공자 사당인 문묘를 새로 건립하여 유교 교육의 진흥에 힘썼음

-       고려 초기에 설치된 국자감은 국학으로 불리다가 1308년부터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음

(성균감→성균관→국자감→성균관으로 변화)

공민왕

성균관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

-       성균관(공민왕 5년 국자감, 공민왕 11년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하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박상충, 이숭인 등이 전문적으로 성리학을 연구 토론하면서 많은 성리학자 배출함

-       공민왕 1(1352)에는 이색의 건의에 따라 벼슬할 사람은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야 하고, 과거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성균관을 거쳐야 한다는 원칙을 세움


*고려시대의 교육기관(1)-국립 http://baobabstar.egloos.com/10910401
*고려시대의 교육기관(2)-사립 http://baobabstar.egloos.com/109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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