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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삼국사기-신라본기


진덕왕


진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승만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 갈문왕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와 바탕이 넉넉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나 되었고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을 넘었다.

원년 정월 17일에 비담을 목베어 죽었는데, 이에 연루되어 죽은 이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연호를 고쳐 '대화'라고 하였다. 8월에 혜성이 남방에 나타나고 또 뭇 별들이 북방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 감물, 동잠의 세 성을 에워쌌다.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악전고투하여 기운이 다했을 때 유신의 휘하 비령자와 그의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싸우다 죽으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떨쳐 일어나 쳐부수어 적군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2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해 요거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이를 근심해 압독주 도독 유신에게 대책을 강구하라 하였다. 유신이 이에 사졸들을 훈계하고 독려하여 거느리고 나가자, 의직이 가로막았다. 유신이 군사를 세 갈래 길로 나누어서 사이에 끼고 공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해 달아났다. 유신이 달아나는 그들을 추격해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겨울에 감질허를 사신으로 당에 보냈는데, 태종이 어사에게 물었다. "신라가 신하로 우리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일컫는가?" 질허가 말하였다. "일찍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 사사로이 연호를 가져왔습니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그러하겠습니까?" 태종이 수긍하였다. 이찬 김춘추와 그이 아들 문왕을 당에 보내 입조시켰더니,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보내 맞이하였다. 이윽고 일행이 도착하자 춘추의 위의가 빼어나고 늠름한 것을 보고 두터이 예우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고자 청하니, 태종이 허락하였다.

한 번은 연회에 불러 만나보고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내려주면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가?" 춘추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우리 나라는 후미진 바다 한 구석에 있어서 공순하게 대국 조정을 섬긴 지 여러 해이나, 백제가 억세고도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범하고 능멸함을 멋대로 하더니, 급기야 지난 해에는 대군을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짓밞아서 대국에 입조할 길조차 막아버렸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조정의 군사를 빌려주시어 저 흉악한 무리를 잘라 없애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 백성들은 남김없이 저들에게 사로잡히고 말 것이니, 그러고서야 산 넘고 물 건너 조알하고 조공하는 일은 더 이상 바랄 수가 없을까 합니다." 태종이 깊이 동감하고 군사를 출정시켜줄 것을 허락하였다. 춘추가 또 관리들의 공복을 고쳐서 중국 제도를 따르겠다고 했더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의복을 내다가 춘추와 그 수행원들에게 내려주고, 조서를 내려 춘추를 특진으로 삼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 작위를 수여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오려 할 때에는 조칙을 내려 3품 이상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게 하니, 그 예우함이 매우 면밀하였다. 춘추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저에게 아들 일곱이 있으니, 폐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곧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 □□에게 명해 머물게 하였다.

춘추는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는데, 그를 수행하던 온군해가 높다란 관모와 큰 옷차람으로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고구려 순라병들은 그를 춘추로 여기고 잡아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니, 왕이 이 일을 듣고 애통해 하였으며, 온군해에게 대아찬의 관위를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넉넉히 포상하였다.

3년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 조정의 의관 복제를 착용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석토성 등 일곱 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에게 명해 나가 막게 했는데,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싸우기를 열흘 동안이나 하였지만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 아래 주둔하게 되었다. 유신이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을 할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이어 사람을 시켜 진영 사이를 돌며 말하게 하기를 "견고히 지켜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결전하리라!"라고 하였다. 백제 첩자가 이를 듣고 은상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증원군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해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진격해 적들을 크게 쳐부수고 장교 1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또 군졸 8천 9백 80명의 목을 베고 전투마 1만 필을 노획했으며, 병장기 같은 것이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4년 여름 4월에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관위에 있는 이는 상아홀을 지니게 하였다. 6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백제 군사를 쳐부순 사실을 알렸다. 또 왕은 5언 율시의 '태평송'을 비단에 수를 놓아 춘추의 아들 법민을 시켜 당 고종에게 바쳤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 '영휘'를 쓰기 시작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나와 백관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법이 이 때 비롯되었다.

2월에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고, 파진찬 죽지를 집사중시로 임명해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를 좌리방부령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수도에 큰 눈이 내렸으며, 왕궁의 남쪽 문이 까닭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8년 봄 3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 지냈다.

신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까지 28명의 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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