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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삼국사기-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태종 무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서현 각찬의 딸이다.

왕은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 진덕왕을 섬겨 관위는 이찬을 지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은 굳게 사양해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높고 두터운 것이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 호걸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춘추는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해 왕위에 나아갔다.

원년 여름 4월에 왕의 아버지를 추봉해 문흥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라 하였으며,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5월에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해 율령을 상세히 참작해서 이방부격 60여 조를 찬수해 제정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 및 말갈이 군사를 연합해 우리 북쪽 영토를 침략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내 도움을 청했더니 3월에 당에서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우위중랑장 소정방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을 태자로 삼고, 여러 아들 가운데 문왕을 이찬으로, 노차를 해찬으로, 인태를 각찬으로, 지경과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에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는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고, 발은 여덟 개였다. 왕의 딸 지조가 대각찬 유신에게 시집갔다. 고루를 월성 안에 세웠다.

4년 가을 7월에 일선군에 홍수가 나서 물에 빠져 죽은 이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 동쪽 토함산에서는 땅이 불타 3년 만에야 꺼졌다.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으며, □□□ 북쪽 바위가 무너지면서 부서지더니 쌀이 되었다. 그것을 먹어보니 창고의 묵은 쌀 같았다.

5년 봄 정월에 중시 문충의 직위를 고쳐 이찬으로 하고, 문왕을 중시로 하였다. 3월에 왕이 하슬라는 그 땅이 말갈과 이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편안할 수 없다고하여, 경을 폐지하고 주로 삼아 도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실직으로 북진을 만들었다.

6년 여름 4월에 백제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자, 왕이 바야흐로 이를 치고자 하여 사신을 당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가을 8월에 아찬 진주를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 공주 기군강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1백 척이었고, 이것을 먹은 사람은 죽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했던 일에 회보가 없는 까닭에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왕 앞에 나타났는데, 마치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 같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비록 몸은 백골이지만 여전히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당에 가서 고조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 백제를 치게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근심하며 기다리는 것이 이와 같으시므로 아룁니다"라고 하더니,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왕은 크게 놀라 기이한 일이라고 여겨 두 집안의 자손들에게 두터이 상을 주고, 아울러 해당 관리에게 명해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자,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당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서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륙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 백제를 치게 했으며, 왕에게도 칙명을 내려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성원하게 하였다.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6월 18일에 남천정에 이르렀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꼬리를 잇대었으며,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10일에 백제 남쪽에 도착해서 대왕의 병력과 회합해서 의자의 도성을 무찌르려고 합니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대군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시는데, 대장군께서 왔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틀림없이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부리나케 달려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면서 법민을 되돌려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하게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하자 왕이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 등에게 명해 정예 병력 5만 명을 이끌고 그에 부응하게 하였으며, 왕 자신은 금돌성에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의 들로 진군해 가니, 백제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먼저 요해처를 차지하고 세 곳에 진영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제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였으며, 사졸들은 힘이 다하고 말았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이에게는 충성보다 귀중한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 위기를 당해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가 함께 온전히 갖추어질 것이다." 이에 반굴이 "삼가 분부 말씀 들어 알겠습니다" 하고, 곧장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도 이들 관장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이지만 뜻과 기백이 제법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서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에 말을 타고 창 하나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적들에게 사로잡혀 계백에게 보내졌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더니 그가 어린 나이에도 용맹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이내 탄식해 말하기를 "신라를 적대할 수 없겠구나. 소년조차 이러하니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떠하겠는가!" 하고는 그만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은 아버지에게 고하기를 "제가 적군 속에 들어가 적장을 베고 그 기를 뽑아 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을 향해 질풍처럼 쳐나갔다. 계백이 그를 붙잡아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아 드니, 흐르는 피가 옷소매를 적셨다. 품일이 말하였다.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3군에서 이 모습을 보고 격정이 솟구쳐 죽음을 각오하고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자, 백제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이 여기서 죽었으며, 좌평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날 정방과 부총관 김인문 등은 기벌포에 도착해 백제군을 만나 맞아 쳐서 크게 이겼다. 유신 등이 당의 군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뒤늦게 왔다 하여 신라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 베려 하였다. 그러자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의 전투를 보지 않은 터에 기일에 늦은 것으로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무고하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을 벌인 뒤에 백제를 쳐부수리라." 이윽고 도끼를 들고 군문 앞에 서니, 머리털이 꼿꼿이 곧추서고 허리춤에서는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정방의 발등을 밟으면서 "신라군이 변랸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정방이 곧 문영에게 들씌웠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의 왕자가 좌평 각가를 시켜 당의 장수에게 글을 보내 철병할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과 신라의 군사가 □□□ 의자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소부리의 들로 나아갔다. 정방은 꺼려지는 바가 있는지 앞에 나서지 못하는데, 유신이 그를 설득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갈래로 일제히 떨쳐 나갔다. 백제의 왕자가 또다시 상좌평을 시켜서 고기와 가축 등을 풍성하게 보냈으나 정방이 받지 않고 물리쳤으며, 백제 왕의 서자 궁이 좌평 여섯 사람과 함께 정방 앞에 나와 죄를 빌었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13일에 의자는 측근을 거느리고 밤에 달아나서 웅진성으로 들어가고, 의자의 아들 융과 대좌평 전복 등이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지난 날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어버린 탓에 내가 20년 동안 가슴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들었구나!" 융은 땅에 엎드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 방령의 군사 등을 이끌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의자가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29일에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에 이르렀으며, 제감 천복을 당에 보내 승전 보고를 하였다.

8월 2일에 술자리를 크게 열어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정방 및 장수들과 함께 높은 당 위에 앉고, 의자와 그 아들 융은 당 아래 앉혔으며, 간혹 의자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날 모척을 잡아 죽였다. 모척은 신라 사람이었는데 백제로 도망해 들어가서 대야성의 검일과 함께 모의해 성을 함락시켰으므로 그의 목을 벤 것이다. 또 검일을 붙방아 그이 죄를 꼽기를 "네가 대야성에 있을 때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살라 없애 온 성 안에 먹을 것이 떨어져 패멸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죄요, 품석 부부를 강박해 죽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며, 백제와 함께 와서 본국을 공격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이다" 하고는,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잔당들은 남잠, 정현 등의 성에 웅거해 있었고, 또 좌평 정무는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에 주둔하면서 당과 신라 사람들을 노략하였다.

26일에 임존의 큰 목책을 공격했으나 적의 병력이 많고 지세가 험준해 이기지 못하였으며, 다만 작은 목책만을 쳐부수었다.

9월 3일에 낭장 유인원이 병력 1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에 남아 지키게 되었는데, 왕자 인태가 사찬 일원, 급찬 길나와 함께 병력 7천 명을 거느리고 그를 도왔다. 정방은 백제 왕 및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으며, 김인문과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이 함께 갔다.

23일에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에 들어와서 사로잡혀 항복한 이들을 빼앗아가려 하였다 유수 유인원이 당과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쫓았다. 적들은 물러나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가 너댓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모여 주둔하면서 틈을 엿보아 성읍을 노략하였다. 백제 사람 가운데 등을 돌려 그들에게 호응하는 성이 20여개나 되었다.

당 고조가 좌위중랑장 왕문도를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28일에 삼년산성에 도착해 조서를 전하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해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해 섰다. 칙명을 전한 다음 문도는 고조가 보낸 물건을 왕에게 주려다가 갑작스레 발작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죽었으므로, 수행원이 대리해 일을 마쳤다.

10월 9일에 왕이 태자와 여러 군단을 거느리고 이례성을 공격해, 18일에 성을 빼앗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니, 백제의 20여 성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에 사비의 남쪽 산마울에 있던 백제군이 목책을 쳐서 1천 5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했는데 군주 필부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5일에 왕이 계탄을 건너 왕흥사잠성을 쳐서 7일만에 이겼으며,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22일에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전공을 평가해 게금족 선복을 급찬으로 삼고,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았으며,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도 관직을 차등있게 추증하였다. 백제 사람들도 아울러 재주를 헤아려 임용했는데, 좌평 충상과 상영, 그리고 달솔 자간에게는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해 총관에 보임하였고, 은솔 무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수여하고 대감에 보임했으며, 은솔 인수에게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제감에 임명하였다.

8년 봄 2월에 백제의 잔당들이 사비성에 쳐들어왔다.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아 잡찬 문왕과 대아찬 양도와 아찬 충상 등을 부장으로 하고,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이찬 진왕을 부장으로 했으며, 아찬 의복을 하주장군으로, 무훌과 욱천 등을 남천대감으로,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서 달려가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 중간쯤 왔을 대 품일이 휘하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 남쪽으로 먼저 가서 진영 세울 곳을 둘러보았다. 이 때 백제 사람들이 우리 진영이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 갑작스레 튀어나와 불의에 급습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도착해 고사비성 바깥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으로 진공했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되돌리니, 대당과 서당이 앞서 행군하고 하주 병력이 후군이 되어 행군하였다. 빈골양에 이르러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 패해 물러나니, 죽은 이는 비록 적었지만 잃어버린 병장기와 군수물자가 매우 많았다. 상주와 낭당의 군사는 각산에서 적을 만나 진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서 2천 명을 잡아 목을 베었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파해 구원하게 했는데, 자시혜진에 이르렀을 때 선발군이 철수하여 가소천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의 패전에 대해 그 책임을 따져서 차등을 두어 처벌하였다.

5월 9일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가 군사를 합해 술천성에 쳐들어 왔다가 이기지 못하자, 방향을 바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포차를 벌여놓고 돌을 쏘아 날리니, 맞는 곳마다 성가퀴와 누옥이 속속 무너졌다. 성주인 대사 동타천은 사람들에게 마름쇠를 성밖에 던져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게 하고, 또 안양사 창고를 헐어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얽고 밧불로 그물 매듭을 쳐서 마소의 가죽과 솜옷을 걸쳐 매달게 했으며, 그 안쪽에 노포를 설치해 지켰다. 당시 성 안에는 겨우 남녀 2천 8백 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리고 허약한 이들까지 능숙하게 격려해 강대한 적들과 맞서 버틴 것이 무릇 20여 일이었다. 그러나 식량이 바닥나고 힘은 다하였다. 이에 동타천이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느닷없이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우뢰와 비가 벽력같이 쏟아지니, 적들은 의아해하고 두려워하며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왕이 동타천을 가상히 여겨 표창하고 대나마의 관위에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가 되더니,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이라고 하였으며,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묘호를 올려 태종이라 하였다. 당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신라왕조 계보: http://baobabstar.egloos.com/1075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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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의 가계도:  http://baobabstar.egloos.com/1094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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