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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로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요 유신의 누이이다.

그녀의 언니가 꿈속에서 서형산 마루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가득 찼다. 꿈을 깨어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동생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 하고는, 비단 치마를 꿈값으로 주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내고 말았다. 유신이 말하였다.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 이윽고 함께 집으로 가서 술자리를 벌여놓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라고 했는데, 보희는 사정이 있어 나오지 않고 그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담백한 화장과 가벼운 옷단장에 빛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눈부시게 하였다. 춘추가 이를 보고 기뻐하여 곧 청혼하고 성례를 했으며, 뒤미쳐 임신해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가 법민이다. 왕비 자의왕후는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자태가 영특했으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원년 6월에 당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인문과 유돈 등이 와서 왕에게 고하였다. "당 고종이 이미 소정방을 보내 35도의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면서, 드디어 왕께도 군사를 일으켜 서로 호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비록 상중이나 고종의 칙명을 어기기가 어려울까 합니다."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인문, 진주, 흠돌을 대당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으로, 군관, 수세, 고순을 남천주총관으로, 술실, 달관, 문영을 수약주총관으로, 문훈, 진순을 하서주총관으로, 진복을 서당총관으로, 의광을 낭당총관으로, 위지를 계금대감으로 임명하였다.

8월에 대왕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시이곡정에 이르러 머물렀을 때, □□ 사자가 와서 보고하였다. "백제의 잔당들이 옹산성에 웅거해 길을 막고 있으므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왕이 먼저 사신을 보내 그들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9월 19일에 대왕이 웅현정에 나아가 머물면서 여러 총관들과 대감들을 집결시켜놓고 친히 나와 훈계하였다. 25일에 군사를 내보내 에워사고, 27일에 이르러 먼저 큰 목책을 불사른 다음 수천 명을 베어 죽이고서야 마침내 항복을 받았다. 전공을 논의해 각간이나 이찬으로서 총관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칼을 내려주고,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서 총관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창을 주었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위를 1품씩 올려주었다. 웅현성을 쌓았다. 상주총관 품일이 일모산군 태수 대당과 사시산군 태수 철천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우술성을 쳐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백제의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가 무리들과 함께 의논해 항복하였다. 조복에게는 급찬의 관위를 주고 아울러 고타야군 태수 직을 수여했으며, 파가에게도 급찬의 관위를 주고 겸하여 밭과 집과 옷가지를 내려주었다.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 고종의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수도로 돌아왔다. 당의 사신이 조상하고 위로했으며, 겸하여 조칙으로 전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빛깔의 비단 5백 단을 증여하였다. 유신 등이 군사를 쉬게 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와서 칙지를 전해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고 하였다.

2년 봄 정월에 왕이 유신과 인문, 양도 등 아홉 명의 장군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대에다가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에서 묵었다.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해 수레가 갈 수 없으므로 짐을 모두 소와 말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를 건너 산양에 이르렀다. 귀당제감 성천과 군사 술천 등이 이현에서 적병을 만나 쳐죽였다.

2월 1일에 유신 등이 장새에 이르니 평양과의 거리가 3만 6천 보 였다. 먼저 보기감 열기 등 15명을 보내 당의 군영으로 가게 하였다. 이 날 바람과 눈으로 날씨가 몹시 차서 얼어붙을 지경이었으므로,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에 이르렀다.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 드을 보내 군량을 전해주고, 소정방에게 은 5천 7백 푸노가 가는 베 30필, 두발 30냥, 우황 19냥을 선물하였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가버렸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되짚어 과천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쫓아오자 군사를 되돌려 싸워서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소형 아달혜 등을 사로잡았으며, 노획한 병장기가 1만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전공을 논의해 본피궁의 재화와 전장과 노복을 반으로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내려주었다.

탐라국주인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 연간 이래로 백제에 신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좌평으로 관직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 때 와서 우리에게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8월에 백제의 잔당들이 내사지성에 모여들어 악행을 하므로, 흠순 등 19명의 장군들을 보내 쳐부수게 하였다.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진흠이 거짓으로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방일하면서 나라 일을 돌보지 않으므로, 마침내 베어 죽이고 아울러 그 일족을 다 죽였다.

사찬 여동이 어머니를 때렸더니 하늘에서 우뢰가 울리고 비가 퍼붓는 가운데 벼락을 맞아 죽었는데, 그 몸 위에 '수□당(須□堂)'의 세 글자가 씌여 있었다.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3년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긴 창고를 짓고 부산성을 쌓았다.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과 사평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며, 덕안성을 공격해 1천 70명의 목을 베었다.

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전왕의 아들 부여풍을 맞이해 왕으로 세우고, 유진랑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당 고종이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삼아 전 도독 왕문도의 병력을 통솔해 우리 군사와 함께 백제 진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도중에 여기저기에서 싸워 진지를 함락시키니 향하는 곳마다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을 에워쌌던 것을 풀고 임존성으로 물러가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여 그의 군사를 아우르고 당에 저항해 도망한 이들을 불러들여 세력이 매우 커졌다. 유인궤는 유인원과 합세해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종이 조서를 내려 우위위장군 손인사를 보내 군사 40만 명을 거느리고 덕물도에 이르러서 웅진부성으로 나가게 하였다. 욍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그들과 합세해 두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 성들을 쳐서 모두 함락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내 달아나고, 왕자 충승과 충지 등은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는데, 유독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해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군사를 되돌려 설리정으로 왔다. 전공을 논의해 차등있게 포상을 시행하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또 의복을 만들어 머물로 지키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지급하였다.

4년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 들어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아찬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았다.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역시 중국의 의복을 입게 하였다.

2월에 관련 부서에 명해 여러 왕들의 능원에 각각 백성 20호씩을 옮겨 살게 하였다. 각간 김인문과 이찬 촌존이 당의 칙사 유인원 및 백제의 부여륭과 함께 웅진에서 맹약을 하였다.

3월에 백제 잔당이 사비산성에 웅거해 반란을 일으키자, 웅진 도독이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었다. 지진이 있었다.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에 보내 당나라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장군 인문, 품일, 군관, 문영 등에게 명해 일선과 한산 두 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부성의 병력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을 쳐서 패멸시켰다.

8월 14일에 지진이 있어 백성들의 가옥이 무너졌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사람들이 함부로 재화와 전답을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년 봄 2월 중시 문훈이 은퇴하자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았다. 이찬 문왕이 죽으니, 왕자의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와 조문하고 겸하여 자줏빛 옷 한 벌, 허리띠 한 벌, 채색 능직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의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두터이 주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칙사 유인원 및 웅진 도독 부여륭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약을 하였다. 처음에 백제가 부여장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자주 강토를 침노하므로 우리가 사신을 들여보내 구원을 요청하느라 사신들의 왕래가 길에 이어졌는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다음 군사를 되돌리자, 그 남은 무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진수사 유인원 및 유인궤 등과 함께 몇 해 동안이나 이들을 경략한 끝에 차츰 평정하게 되었다 이에 당 고종은 부여륭에게 조서를 내려 돌아가서 남은 백성들을 위무하고, 나아가 우리와 화친하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흰 말을 잡아 맹세하는데, 먼저 하늘과 땅 및 산천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입에 백마의 피를 머금었다.

피 바르는 절차를 마친 다음 제물들은 제단의 북쪽 땅에 묻고, 그 문서는 우리의 종묘에 간직해 두었다. 이리하여 유인궤는 우리의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 네 나라의 사신을 거느리고 뱃길로 서쪽으로 돌아가서 태산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에 일선주와 거열주의 주민들이 군수품을 하서주로 수송하였다.

6년 봄 2월에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있었다.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천존의 아들 한림과 유신의 아들 삼광이 모두 나마로서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왕은 이미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없애고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겨울 12월에 당에서는 이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 안륙 출신 학처준을 보좌로 삼아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의 권신 연정토가 12성과 7백 63호, 3천 5백 43명을 이끌고 와서 투항하였다. 연정토와 그 예하 관료 24명에게는 옷가지와 식량과 집을 지급하고 왕도와 주, 부 등에 안치하였으며, 그 가운데 8개 성은 완비되어 있었으므로 사졸들을 보내 진무해 지키도록 하였다.

7년 가을 7월에 3일 동안 큰 술자리를 베풀었다. 당 고종이 조칙을 내려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쟁터에 가게 하니, 왕이 즉시 지경을 파진찬으로, 개원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또 고종이 칙령으로 일원 대아찬을 운휘장군으로 삼으니, 왕이 명하여 궁궐 뜰에서 칙명을 받게 하였다. 대나마 집항세를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고종이 유인원과 김인태에게는 비열도를 따라서, 그리고 우리 군사를 징발해서는 다곡과 해곡의 두 길을 따라서 평양으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수도를 출발해, 9월에 한성정에 이르러, 영공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에 영공이 평양성 북쪽 2백 리 지점에 이르러 이동혜촌주 대나마 강심을 보내 거란 기병 80여 명을 거느리고 아진함성을 지나 한성에 도착해서 편지를 보내와 군사 동원 기일을 독촉하니, 대왕이 그대로 좇았다. 11월 11일에 장새에 이르렀을 때,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 역시 되돌아왔다. 아울러 강심에게 급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5백 석을 내려주었다.

12월에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의 유진장군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해 고구려 정벌을ㄹ 도우라 하고, 아울러 왕에게 대장군의 정절을 내려주었다.

8년 봄에 아마가 와서 항복하엿따. 원기와 정토를 당에 들여보냈더니, 정토는 그곳에 남아 돌아오지 않고 원기만 돌아왔다. 이후로는 여자를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고종의 조칙이 있었다.

3월에 차진찬 지경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이어 파진찬 용문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혜성이 천선성 자리에 머물렀다.

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 흠순, 천존, 문충과 집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 개원, 흠돌을 대당총관으로 삼았다. 또 이찬 진순과 죽지를 경정총관으로 , 이찬 품일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총관으로, 이찬 인태를 비열도총관으로, 잡찬 군관과 대아찬 도유, 아찬 용장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과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를 비열성주 행군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과 아찬 장순, 순장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친찬 의복과 아찬 천광을 서당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을 계금당총관으로 삼았다.

22일에 웅진부성의 우인원이 귀간 미힐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 및 한성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했음을 알려오니, 왕이 일길찬 진공을 보내 치하하였다. 인문, 천존, 도유 등이 일선주 등 일곱 군과 한성주의 병력을 거느리고 당의 군영으로 갔다. 27일에는 왕이 수도를 떠나 당의 군영으로 가고, 29일에는 여러 방면의 총관들이 떠나갔다. 왕은 유신이 풍병에 걸렸다 하여 수도에 남아 있도록 하였다. 인문 등이 영공을 만나 영류산 아래로 진군하였다.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주에 도착해서 여러 총관들에게 교시하여, 가서 당나라 군사와 회집하에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의 들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9월 21일에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게 가서 항복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영공이 왕 보장과 왕자 복남, 덕남 및 대신 등 20여만 명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때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가 영공을 따라 돌아가고 인태, 의복, 수세, 천광, 홍원도 일행을 따라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멸망시킬 때 왕은 한성을 떠나 평양을 목표로 하여 일차양에서 머물다가, 당의 여러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위를 내려주고, 김인문에게는 대각간을 주었으며, 그밖에 이찬의 장군 등은 모두 각간으로 삼고, 소판 이하는 모두 관위를 1등급씩 올려주었다. 대당소감 본득은 사천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고, 한산주 소감 박형한은 평양성 안에서 군주 술탈을 죽여 공로가 으뜸이었으며, 흑악령 선극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모두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1천 석을 내려주었다. 서당당주 김둔산은 평양 군영 전추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사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7백 석을 내려주었다. 군사인 남한산의 북거는 평양성 북문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1천 석을 내려주었다 군사인 부양의 구기는 평양의 남교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7백 석을 내려주었다. 가군사인 비열홀의 세활은 평양의 소성 전투에서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고간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 5백 석을 내려주었다. 한산주 소감 김상경은 사천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로가 으듬이었으므로, 일길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조 1천 석을 내려주었다. 아술의 사찬 구율은 사천 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건너 나와서 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군령도 없이 멋대로 위험한 길에 들어갔다 하여 그 전공이 비록 으뜸이지만 등록되지 않았다. 그러자 구율은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서 죽으려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해 죽지 못하였다.

25일에 왕이 수도로 돌아오는 도중 욕돌역에 이르자 국원경의 사신 용장 대아찬이 사사로이 자리를 베풀어 왕과 여러 시종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의 아들 능안의 나이 15세였는데 가야의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그의 얼굴과 거동이 단아하고 고운 것을 보고는 앞으로 불러 등을 어루만지며 금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을 자못 후하게 내려주었다.

11월 5일에 왕이 사로잡은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데리고 수도로 들어왔다. 6일에는 문문 관료들을 거느리고 선조의 묘당에 조알하고 고하였다. "삼가 선왕의 뜻을 이어 당과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문초해 그 괴수를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해졌으므로, 감히 고하니 신령이여, 들으소서." 18일에는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소감 이상에게는 10□□필을, 그를 시종한 이에게는 20필을 내려주었다. 12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있었다.

9년 봄 정월에 신혜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았다. 당의 승려 법안이 와서 천자의 명령을 전하고 자석을 구하였다. 2월 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지난 날 우리 신라는 두 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북쪽을 치고 서쪽을 침공하느라 잠시도 평안한 해가 없었다. 군사들은 뼈를 드러낸 채 들에 쌓이고 몸뚱이와 머리가 서로 멀리 나뉘어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참혹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임금의 존귀함도 잊으시고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고자 대궐에 이르셨거니와, 이는 본디 두 나라를 평정해 길이 싸움을 없이 하고, 여러 대 동안 깊이 맺힌 원한을 씻으며, 백성들이 가련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비록 평정되었으나 고구려를 미처 멸망시키지 못한 채 과인인 그 평정을 완수할 유업을 계승해 마침내 선왕의 뜻을 다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고 사방이 잠잠하고 태평해졌다.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는 이미 모두 포상을 받았고 전사한 이의 혼백을 위해 명복을 빌 자용도 추증하였다. 다만 옥중에세만은 그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쓰고 족쇄에 묶여 있는 고통에서 아직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혜택을 받지 못했으니, 생각이 이 일에 미치면 자고 먹는 것도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나라 안의 죄수들을 사면해야 할 것이니, 총장 2년 2월 21일 새벽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5역죄를 범해 사형에 처해질 죄수 이하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은 그 죄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빠짐없이 석방할 것이요, 앞서 사면을 받은 이후 다시 죄를 저질러 관작을 빼앗긴 이들도 모두 원래대로 회복시켜 줄 것이며, 도적질한 이는 그 몸만 석방하되 재물로 상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백성 가운데 빈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렸다가 흉년이 든 지방에 사는 이는 본래의 부채와 이자 모두 상환을 면제해주고, 만약 풍녕이 든 지방에 사는 이라면 올해 수확 때까지 기다려 다만 원래의 부채만 갚게 하고 그 이자는 면제해주어라. □□ 30일을 기한으로 관련 부서는 받들어 집행하라."

여름 5월에 천정, 비열홀, 각련 등 세 군의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지진산 급찬 등을 당에 들여보내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 흠순 각간과 양도 파진찬을 당에 들여보내 사죄하였다. 겨울에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고 쇠뇌 기술자 구진천 사찬을 데리고 돌아갔다. 당 고종이 그에게 나무로 쇠뇌를 만들게 했더니 화살이 30보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물었다. "듣자하니 너희 나라에서는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간다는데 지금 겨우 30보를 가니 어찌된 일이냐?" 사찬이 대답하였다. "재질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본국의 목재를 가져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고종이 사신을 보내 나무를 구하므로 곧 나무와 함께 복한 대나마를 보냈다. 이윽고 고쳐 만들도록 명을 받았는데, 쏘아보니 60보를 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사찬이 대답하였다. "저 역시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나무가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가 찼던 것 같습니다." 고종은 그가 짐짓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중죄로 위협했으나, 끝내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

말 목장을 모두 1백 74개소에 나누어 두었다. 소내에 22개소, 관에 10개소를 소속시키고, 김유신 태대각간에게 6개소, 김인문 태각간에게 5개소, 각간 7명에게 각각 3개소, 이찬 5명에게 각각 2개소, 소판 4명에게 각각 2개소, 파진찬 6명과 대아찬 12명에게 각각 1개소씩을 내려주고, 이하 74개소는 적당하게 내려주었다.

10년 봄 정월에 고종이 흠순의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해 가두어두었는데 끝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왕이 멋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차지했다 하여 고종이 문책하고 노하여 거듭 사자를 억류했기 때문이다.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더불어 각각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에 이르니, □□□ 말갈 병사가 먼저 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그들을 상대해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겼으며, 목을 벤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뒤를 이어 이르니 우리 군사가 백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장 대형이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일행이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떠받들고, 소형 다식 등을 보내 애걸하였다.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옳은 의리이니, 오직 대국에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선왕이 도의를 잃고 패멸당하였으나, 이제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찾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고 제후의 나라가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지방 금마저에 자리잡게 하였다.

한기부의 여인이 한꺼번에 3남 1녀를 출산하였으므로, 벼 2백 석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신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 도독부에 보내서 화친을 요청했으나, 도독부에서는 듣지 않고 바로 사마 예군을 보내 우리를 정탐하게 하였다. 왕이 저들에게 우리에 대한 음모가 있음을 알고, 예군을 억류해 돌려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문충, 중신, 의관, 천관 등이 63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 주민들을 내지로 옮겼다. 천존과 죽지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과 문영은 12성을 빼앗고 적병을 쳐서 7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투마와 병장기들을 매우 많이 노획하였다. 왕이 돌아와 중신, 의관, 달관, 흥원 등이 □□□사 진영에서 퇴각한 것은 그 죄가 마땅히 죽여야 할 만한 것이지만 용서하여 면직히키고, 창길우□□□□일에게는 각각 급찬의 관위를 수여하고 벼를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 세차 경오 가을 8월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명을 보낸다.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쪽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은 청구에 떨쳤으며, 어진 교화가 현도를 뒤덮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 근본과 가지가 끊이지 않고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어 거의 8백 년이 되려 할 때, 남건과 남산의 형제에 이르러 화란이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골육 사이에 틈이 나 집안과 나라가 파탄되고 망하니, 종묘 사직은 인멸되었으며, 생령들은 동요하고 들끓어 마음 둘 데가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난관을 피해 다니다가 이웃 나라에 홀몸을 던져오니, 그 유랑의 온갖 고생이야 진 문광의 자취와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위 선공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백성에게 임금이 없을 수 없으며, 하늘은 반드시 사랑을 베풀어주실 것이니, 선왕의 바른 후계자로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요, 제사를 주관할 이 또한 공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제 삼가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사신을로 보내 책명을 전하게 하여 공을 고구려 왕으로 삼는다.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왕통을 이어 일으켜서, 길이 이웃 나라가 되어 일마다 형제와 같이 할 것이니, 삼가고 삼가라! 아울러 멥쌀 2천 석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능라 다섯 필, 견직 및 가는 베 각각 열, 솜 열다섯 저울을 보내니 왕을 이를 받아라."

12월에 토성이 달에 들어가고,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중시 지경이 물러났다.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스스로 말하였다. "해돋는 곳에 가까우므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성주 총관 수세가 백제의 □□□□□□, 마침 그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 진주를 보내 베어 죽였다.

11년 봄 정월에 이찬 예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침공해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가 죽었다. 말갈 군사가 와서 설구성을 에워쌌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차 물러나려 할 때,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와서 백제를 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 □□□□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옹포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뛰어들었는데 □□□□□□□□□□ 1촌이었다. 여름 4월에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에 장군 죽지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림성 벼를 짓밟게 하고,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여 명을 목베어 죽이고 백제 장군 두 사람과 당나라 과의 여섯 명을 사로잡았다.

가을 7월 26일에 당의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를 시켜서 협박과 회유의 글을 보내자 대왕이 답장을 보내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소부리주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6일에 당의 운송선 70여 척을 공격해 낭장 겸이대후와 사졸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 죽은 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로가 으뜸이었으므로, 그에게 사찬의 관위를 수여하였다.

12년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의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또 이근행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일시에 평양에 이르러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머물러 주둔하였다. 8월에는 한시성과 마읍성을 쳐서 이기고, 병력을 백수성에서 5백 보쯤 떨어진 곳에 진주시켜 진영을 만들었다. 우리 군사가 고구려 군사와 함께 이들을 맞받아 싸워서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니 추격해 석문에 이르러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으며,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과 산세, 아찬 능신과 두선, 일길찬 안나함과 양신 등이 죽었다. 한산주의 주장성을 쌓으니, 주위가 4천 3백 60보였다.

9월에 혜성이 일곱 번이나 북방에 출현하였다.

왕은 지난 번에 백제가 당에 가서 호소하고 군사를 청해 우리를 침노하려 들자 사태의 형세가 급박하여 황제에게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토벌했던 바, 이로 말미암아 대국의 조정에 죄를 지었으므로, 마침내 급찬 원천과 나마 변산을 보내 억류해 두었던 당나라 병선랑장 겸이대후,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 도독 부사마 예군, 증산 사마 법총, 그리고 군사 1백 70명을 돌려보내면서 표문을 보내 무마하였다. 이와 아울러 은 3만 3천 5백 푼, 구리 3만 3천 푼, 바늘 4백 매, 우황 1백 20푼, 금 1백 20푼, 40승포 6필, 30승포 60필을 예물로 보냈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해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에 큰 별이 황룡사와 재성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를 사찬으로 임명하고, 해마다 조 2백 석을 내려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의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가 반역하여 당에 붙고자 획책했는데, 그 일이 누설되어 처형당하고 처자식은 천인으로 만들었다. 8월에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았다. 사열산성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 북형산성, 소문성, 이산성 및 수약주의 주양성, 달함군의 주잠성, 거열주의 만흥사산성, 삽량주의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의 군사가 말갈 및 거란 병력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와, 무릇 아홉 번을 싸워 우리 군사가 승리하고 2천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당나라 군사 가운데 호로와 왕봉의 두 강에 뻐져 죽은 이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 우잠성을 쳐서 항복을 받고, 거란과 말갈의 군사는 대양성과 동자성을 쳐서 패멸시켰다.

처음으로 외사정을 두었는데, 주에는 2명, 군에는 1명이었다. 처음에 태종왕이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국경을 지키는 수병을 없앴던 것을, 이때 와서 다시 두었다.

14년 봄 정월에 당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대나마 덕복이 역술을 배워 지니고 돌아오니, 새 역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왕이 당에 저항하는 고구려의 반민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또 당의 수도에 있던 왕의 아우 대장군 임해군공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는 한편, 좌서자 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을 보좌로 삼아 군사를 동원해 와서 치게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 의안법사를 대서성으로 임명하고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

왕이 영묘사 앞길에 행차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의 6진병법을 관람하였다.

15년 봄 정월에 구리로 만든 관부 및 주와 군의 인장을 주조해 나누어주었다.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우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자 고종이 조서를 내려 이근행을 안동 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하게 하였다. 왕이 그제야 사신을 들여보내 조공하고 또 사죄했더니 황제가 용서하여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으며, 이에 따라 김인문이 중도에서 돌아오게 되니 다시 고쳐서 그를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왕은 백제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마침내 고구려의 남쪽 지경까지 다다라 주와 군을 만들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병력과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군단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에서 처형된 것을 기화로, 풍훈을 길잡이 삼아 천성에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맞받아 싸워 이기고 1천 4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 달아나므로, 전투마 1천 필을 획득하였다.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었다. 우리 군사가 이를 쳐서 쫓아버리고 전투마 3만 3백 80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밖의 병장기도 이에 맞먹었다. 사신을 토산물과 함께 당에 들여보냈다. 안북하를 따라서 관문과 성채를 설치했으며,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성주 소나가 맞아 싸우다가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와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했는데,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고 쳐 없애려 하니,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다가 힘이 다해 다 함께 죽었다. 당나라 군사는 다시 석현성을 에워싸 함락시키니, 현령 선백과 실모 둥이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더불어 열 여덟 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하여 모두 이기고, 6천 47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투마 2백 필을 얻었다.

16년 봄 2월에 고승 의상이 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혜성이 북하성과 적수성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6, 7보 가량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에 쳐들어와 함릭시키니,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 시득이 수군을 거느니고 설인귀와 더불어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 패배했으나, 다시 진군해 스물 두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를 이기고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재상 진순이 은퇴를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17년 봄 3월에 왕이 강무전의 남쪽 문에서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처음으로 좌사록관을 두었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18년 봄 정월에 선부령 한 명을 두고 선박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좌·우리방부경을 각 한 명씩 더 두었다. 북원소경을 두고, 대아찬 오기에게 이를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 춘자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5월에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쳤는데, 깃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는 털이 나 있었다.

19년 봄 정월에 중시 춘장이 병으로 사직하고, 서불한 천존이 중시가 되었다. 2월에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진무하였다. 궁궐을 중수했는데 자못 웅장하고 화려함을 다하였다. 여름 4월에 형혹성이 우림성 자리에 머물렀다. 6월에 태백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 자리를 침범하였다. 가을 8우러에 태백성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을 처음으로 짓고 비로소 안팎에 있는 모든 문들의 현판 이름을 제정하였다.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20년 봄 2월에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금은의 그릇과 여러 빛깔의 비단 1백 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마침내 왕의 누이를 그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으뜸이며 교화의 기초는 후사를 잇는 것이 제일인데, 왕에게는 아내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어진 짝을 생각하고 있을 것인 바, 오랫동안 내조할 배필을 비어 두어 끝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빠뜨려서는 안될 일이다. 이제 좋은 때 길한 날을 택해 옛 법도에 따라 과인의 누이의 딸을 반려로 삼게 한다. 왕은 의당 함께 정을 돈독히 하여 삼가 조상의 묘사를 받들고, 자손이 번창하여 길이 반석같이 융성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름 5월에 고구려 왕이 대장군 연무 등을 시켜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신 안승은 아룁니다. 대아찬 김관장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전하고 아룰러 교서를 내렸거니와, 대왕의 생질을 저희 지방의 안주인으로 삼으시고 곧이어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니, 기쁨과 두려움이 마음에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요임금의 딸이 순에게 시집가고 주실의 왕녀가 제나라에 시집간 것은 본디 거룩한 덕을 드날린 것이요 범속한 임물에 관계될 바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본래 용렬한 부류로 행동과 재능에서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다행히 창성하는 시운을 만나 거룩한 교화에 흠뻑 젖어 매양 특별한 은택을 입고 보답할 길이 없었는데, 이제 거듭 대왕의 총애를 입게 되어 인친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꽃은 농염하게 피어 경사를 표하고 사라은 화락하여 덕을 이루었습니다. 좋은 날 좋은 때를 가려 저의 집으로 출가하게 하시니, 억 년 동안에도 만나기 어려운 일을 하루아침에 얻었는 바, 이러한 일이야 본래 바라지도 못하던 일이요, 뜻밖의 기쁨이니, 어찌 한두 명의 부형들만이 이 은혜를 받았다 할 것이겠습니까? 선조 이하 모두가 진실로 기뻐할 은총입니다. 저는 아직 대왕의 교지를 받지 못해 감히 곧 가서 알현하지 못하나, 지극한 기쁨을 이기지 못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룁니다."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에 종일토록 캄캄해 밤과 같이 어두웠다. 사찬 무선이 정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비열홀을 수비하였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에 지진이 있었으며 유성이 삼대성 자리를 침범하였다. 6월에 천구성이 서남방에 떨어졌다.

왕이 도성을 새롭게 하고자 승려 의상에게 물었더니, 의상이 대답하였다. "비록 초야의 띠집에서 살더라도 바른 도를 행한다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해 궁성을 짓는다 해도 또한 이로울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그만 공사를 중지하였다.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세속에서 전해오기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 하니, 이로 인해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고 하였다. 왕이 남긴 조서는 이러하다.

"과인이 어지러운 시운과 전쟁의 때를 만나 서쪽을 치고 복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붙좇는 이를 불러들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들이 평안해졌다. 위로는 조종의 끼치신 사람을 위로해 올리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수를 갚았다. 산 이나 죽은 이 모두에게 두루 상을 추증하고 안팎에 고르게 관작을 나누어 주었으며,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을 어질고 오래 살도록 이끌었다. 납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덜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백성들은 안도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에는 풀만이 무성하니, 저승에서나 이승에서나 부끄러움이 없다 할 것이며, 상하의 여러 인사들에게도 저버린 바가 없다 하겠다. 그러나 풍상을 무릅쓰다 보니 마침내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운수는 떠나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이니, 갑자기 명계로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어진 덕행을 쌓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뭇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를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남은 이를 섬기는 예의를 잃지 말라. 종묘 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두어서는 안될 것이니, 태자는 장사 지내기 전에 곧장 관 앞에서 왕위를 이어 오르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모습을 바꾸고 사람의 세대도 변하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향로의 광채를 볼 것이며, 위 임금의 서릉 유적에서도 오직 동작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뿐이다. 옛날에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개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나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임종 후 열흘이 되면 바로 왕궁의 고문 밖 뜰에서 서역의 법식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본래 정해진 규례가 있을 터이나 장례 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 변방의 성들과 방위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는 일에 긴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과 격식 가운데 불편한 것들은 즉시 편의대로 고쳐 반포할 것이며,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포고해 나의 이러한 뜻을 알리고 책임자가 시행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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