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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난 한국사 자료-삼국시대/통일신라

김헌창의 난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군신들은 곧 후사를 논의하였다. 왕의 족자(族子)인 김주원을 세우려하였다. 주원은 그 집이 경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그 때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天)의 물이 불어 주원이 즉시 오지 못하니 혹자는 말하되 '인군의 큰 자리는 본래 사람의 계략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敬信)은 제왕의 아우로 덕망이 본래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중신들은 만장일치하여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하니 얼마 아니하여 비가 그치고 국인들은 다 만세를 불렀다.


- 삼국사기 中 '신라본기' 원성왕 편 -


김헌창은 태종 무열왕의 7대손으로 그의 아버지 김주원은 제37대 임금인 선덕왕이 죽었을 때 왕위 계승의 제1후보자였으나, 김주원 대신 상대등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38대 임금인 원성왕이었다. 김춘추로부터 지속되어왔던 무열왕계의 왕위세습은 단절되고 신라 내물왕의 후손인 원성왕계의 일가에 의해서 왕위가 독점 계승하게 되었다. 김헌창은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이 되어 당시 원성왕의 후손 중 실력자인 상대등 김언승(훗날 헌덕왕)에 버금가는 실력자였으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함에 불만을 품고는 헌덕왕 14년(822년) 3월에 웅천주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을 가리켜 김헌창의 난이라고 한다. 김헌창은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충천주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한때 신라의 9주5소경 가운데 4주3소경을 장악하여 기세를 올렸지만, 청주도독 향영이 도망하여 퇴화군으로 가고 완산주장사 최웅이 조정에 반란을 고함에 따라,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왕은 서울을 수비하게 하고 장웅, 위공, 제릉(悌凌) 등에게 김헌창을 격퇴하게 하였다. 장웅은 도동현에서 헌창의 군대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한 뒤 속리산에서 헌창의 군사를 격멸하였다. 균정이 성산에서 승리한 뒤 웅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김헌창은 자살함으로써 반란은 끝이 났다. 김헌창은 참시(斬屍)되고, 이에 동조한 친족들과 도당 239명이 사형 당했지만, 반란 세력에 의해 병졸로 동원된 양민 등은 방면되었다.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계 귀족들은 크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당시 토벌군의 진압과정에서 피신해 목숨은 건졌으나, 825년고달산의 산적, 수신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난 역식 곧 진압되었다. 김헌창의 아들의 난 역시 실패로 끝남으로써, 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 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원성왕 http://baobabstar.egloos.com/10944582
*헌덕왕
http://baobabstar.egloos.com/10947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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